2021년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인 필리핀 언론인 마리아 레사가 8일(현지 시각) 수상 발표 직후 마닐라 자택에서 자신이 설립한 온라인 매체 ‘래플러’와 화상 인터뷰를 하던 중 웃고 있다.(왼쪽 사진) 다른 수상자인 러시아 언론인 드미트리 무라토프가 같은 날 자신이 설립한 신문인 노바야가제타의 모스크바 사무실 밖에서 기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노벨위원회는 이날 “레사와 무라토프는 필리핀과 러시아에서 표현의 자유를 위한 용감한 싸움을 벌였다”며 두 사람을 수상자로 선정했다. /AFP 연합뉴스

2021년 노벨 평화상은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운 필리핀과 러시아 언론인 2명이 공동 수상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8일(현지 시각) 필리핀에서 로드리고 두테르테 정권에 맞서 온라인 언론사를 운영해온 마리아 레사(58)와 러시아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의 언론 통제에 저항한 신문사 편집장 드미트리 무라토프(60)를 올해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베리트 라이스-안데르센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위원장은 “민주주의와 항구적인 평화의 전제조건인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두 사람의 노력에 존경을 표한다”며 “두 명의 수상자는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가 점점 더 불리한 여건에 놓이는 세상에서 (언론의 자유라는) 이상을 실현하려는 모든 언론인을 대표한다”고 했다. 언론인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은 1935년 독일의 전쟁 재무장 실태를 고발한 독일 기자 카를 폰 오시에츠키 이후 86년 만이다.

202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필리핀계 미국 언론인 마리아 레사/AFP 연합뉴스

CNN 필리핀 지국장이었던 레사는 2012년 ‘래플러’라는 필리핀의 반정부 온라인 언론사를 설립해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권위주의 통치를 비판해왔다. 래플러가 탐사 보도를 통해 정권의 부패와 무능을 고발하면 필리핀의 각 부처나 정부 산하기관들은 레사와 래플러를 상대로 무더기로 명예훼손 소송을 걸어 입을 막으려 했다. 기사에 대한 소송뿐 아니라 두테르테 정권은 레사에 대해 외국환 관리법 위반 혐의로 수사하거나, 래플러에 대해 탈세 혐의를 적용하는 등 수사기관을 앞세워 다각도로 압박을 가했다. 레사는 지난 1월 체포됐을 때 “2년도 안 되는 사이 열 번째 체포영장이 발부됐다”며 “나와 래플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레사에 대해 필리핀 법원은 지난해 온라인상 명예훼손 혐의로 유죄를 선고했으며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유죄가 확정될 경우 레사는 최대 징역 6년형에 처해질 수 있다.

레사와 래플러는 특히 재판 없이 수천 명의 용의자를 사살한 두테르테의 초법적인 마약 반대 캠페인에 반대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노벨위원회는 “레사가 두려움 없이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해왔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고 밝혔다. 앞서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은 레사를 2018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고, 2019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레사는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을 전해 듣고 “나와 동료들이 싸움을 계속해나갈 수 있는 엄청난 에너지를 얻었다”며 “사실(facts) 없이는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 사실이 없는 세계는 진실과 신뢰가 없는 세계를 의미한다”고 했다.

2021년 노벨 평화상 공동 수상자인 러시아 언론인 드미트리 무라토프/AP 연합뉴스

러시아의 무라토프는 1993년 대표적인 반정부 신문인 노바야 가제타를 공동 설립했다. 출범 당시 노바야 가제타는 컴퓨터 두 대와 프린터 한 대로 출발했다. 이 소식을 들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199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을 때 상금의 일부를 기부해 기자들 월급을 주고 컴퓨터를 사들였다는 일화는 러시아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무라토프는 1995년 이후 총 24년간 노바야 가제타의 편집장으로 일하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언론 탄압에 맞섰다. 노바야 가제타는 심층 취재를 통해 경찰의 야권 인사 불법 체포, 선거 조작, 공무원 부패, 온라인 여론 조작 등을 폭로하는 매체로 명성을 높였다.

노바야 가제타는 체첸 전쟁의 불합리성을 폭로한 안나 폴리코프스카야 기자가 2006년 살해당한 것을 비롯해 창간 이후 6명의 소속 기자가 의문의 살해를 당하는 위협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문을 발행해왔다. 노벨평화상 수상이 발표되기 전날인 7일은 폴리코프스카야가 숨진 지 15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노벨위원회는 “6명의 기자가 살해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무라토프는 ‘저널리즘의 윤리적인 기준을 준수한다면 언론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쓸 수 있다’는 권리를 일관되게 지켜왔다”고 밝혔다.

무라토프는 2007년 언론인보호위원회(CPJ)가 주는 세계언론자유상을 받았다. 무라토프는 이날 “노벨평화상 수상은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다 죽은 동료들을 위한 것”이라며 “억압받는 러시아 저널리즘을 위해 대표하는 역할을 계속 맡겠다”고 했다.

노벨위원회는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사실에 기반한 저널리즘은 권력의 남용과 허위 선전으로부터 (대중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며 “표현의 자유는 전쟁과 분쟁에 대항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이라고 했다. 노벨위원회는 이어 “레사와 무라토프를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한 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